1.
- 편지를 받을 누군가에게
세계의 끝엔 낙원이 있을까요? 아니면, 종말은 그저 종말일 뿐일까요.
요즘 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이 편지가 누군가에게 닿는다니 묘한 기분이네요. 마치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흰 도화지에 혼자 떠드는 것 같기도 해요.
거긴 날씨가 어떤가요?
요즘은 따뜻한 날씨가 그리워요. 아, 본 적이 없으니 그립단 말은 틀린 말일까요? 여긴 찬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거든요. 여름을 맞은 지 너무 오래예요. 제가 태어난 후엔 끝없는 겨울이 펼쳐졌다고 하니, 아마 앞으로도 여름을 볼 날은 없겠죠.
누군가는 제게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로움에 미쳐 돌아 애먼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괜히 외로움을 흉내낸다고 한다든가. 그렇지만 잘 모르겠어요. 따뜻함이 그립다는 건 알고 있지만요.
여름을 좋아하시나요? 여름과 바다를 알고 있다면 짧막한 말이어도 좋으니, 제게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표현을 부탁드려요.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채원서
-얼굴 모를 누군가에게
당신이 보낸 이 편지는 제게 닿았습니다.
당신이 말을 건 벽 뒤에는 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주세요.
만약 제게 물으신 거라면, 저는 낙원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누군가에겐 종말도, 다른 누군가에겐 낙원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곳의 풍경은 사시사철이 아름답고, 365일 사람이 살기 좋은 날씨입니다. 사실, 이걸 아름답다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상은 강이 마르고, 바다가 말랐습니다. 빙하가 녹아 땅이 가라앉을 거라 걱정하던 사람들은 지상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지하로 내려왔고, 이곳에서 문명의 발전을 이뤘어요.
제 이름은 백해온입니다.
혹시, 해온이라는 이름의 뜻을 아시나요? 바다 해 海 자에 따뜻할 온 溫 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따뜻한 바다라니, 더이상 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인데도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이름에는, 누군가의 추억이 담겨있답니다. 더는 돌아가지 못할, 그 시절의 풍경들을 새로 태어난 생명에게 부여하며 추억하는 것이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여름을 좋아한다고 물으신다면… 네. 이것도 여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에요. 지하라고는 하지만 이곳에는 늘 해가 떠있고, 원한다면 언제든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제가 느낀 여름을 설명드리자면, 어딘지 눅눅하고 텁텁한 공기와 눈부실 뿐 뜨겁지 못한 태양, 그리고 바다내음(사실 저는 바다내음이 어떤 향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상에서 내려오신 노인분께서 말하길, 비릿하고 짠내가 가득한 향이라더군요.)이 사라진 바닷물이겠네요.
편지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만약 이 편지가 무사히 도착한다면, 답신을 부탁드릴게요.
-백해온
2.
- 백해온 씨에게
편지 잘 받았습니다. 이 데이터가 거기까지 무사히 도달한 건 굉장한 행운이군요. 아마 다른 세계일까요?
누군가에겐 종말이어도, 다른 누군가에겐 낙원일 수 있다니 어떠면 절 노리고 하는 말인듯 합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있으니 말이에요.
‘아름답다’ 라는 단어는 알고 있습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만족을 준다. 사전적 의미긴 하지만 해온 씨가 사는 곳은 그런 곳이군요. 아, 해온 씨라 불러도 될까요? 불편하다면 말씀 주세요.
제가 사는 곳과 해온 씨가 사는 곳은 정 반대인 듯합니다. 저는 열기가 어떤 건지 잘 모르고, 또한 높은 첨탑에 머뭅니다. 하늘과 가깝고, 땅과는 먼 위치죠. 이것도 해온 씨의 세상과 다르다 여겨집니다.
예쁜 이름이에요. 분명 해온 씨의 부모님께서 고심하여 지은 이름일 테니까요. 심지어 그러한 뜻이 담겨있다면 더욱이요. 해온 씨는 축복 받는 존재군요. 사람들은 가끔 그렇게 자신의 소망을 남에게 부여하는 듯합니다.
저는 근원 원 源에 닿을 서 遾 자를 써요. 근원에 다다르다. 제 존재 가치와 잘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해온 씨의 이름 뜻을 들으니 낭만적인 이름이 가지고 싶단 생각이 들어요. 비록 제가 부모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지금 곁에 없지만, 혼자서라도 지어보면 어떨까 싶어 지어봅니다. 원할 원 願에 여름 서 暑. 어떤가요, 어울리나요? 이 이름엔 해온 씨의 지분도 있습니다.
언젠간 해온 씨의 세상에서 해수욕을 즐겨 보고 싶어요. 이곳은 사시사철 어둡거든요. 사람이 그립기도 합니다. 눅눅하고 텁텁한 공기가 어떤 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우선 그렇게 배워두겠습니다.
오늘은 창 밖을 바라보며 달을 구경했어요. 제가 머무는 곳에 위치한 거라곤 녹슬은 기계들이 전부거든요. 해온 씨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셨나요?
당신과 만나서 기뻐요. 부디 내게 많은 걸 알려주고, 우리 서로 많은 걸 알아가길 바랍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채원서
- 채원서 씨에게
제가 사는 곳에는 겨울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으니, 원서 씨 말대로 아마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겠네요. 모쪼록 편하게 불러 주세요. 저도 원서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첨탑과 지하. 저희는 정말 정반대이지만, 또 아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이네요. 원할 원에 여름 서.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원서 씨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어느 쪽의 이름이든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는 아주 운이 좋은 하루였습니다. 물론, 이 행운에는 원서 씨의 편지까지 포함이고요. 이곳에 일상은 늘 단조롭고 하루하루가 비슷하기에, 처음 도착한 편지를 읽었을 때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실제 달을 본 적이 없습니다. 천장 속 스크린 너머로 보았던 달은 아름다웠으나, 지상에서 달을 보았던 사람들의 말로는… 글쎄요. 그 어떤 기술을 가져와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더군요. 저도 언젠간 원서 씨의 세상에서 달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하늘과 가장 가까이서 보는 달이라니, 제게는 그것도 나름의 낭만으로 다가오는군요. 제가 지하에 살기 때문일까요?
원서 씨.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가 있으신가요?
이곳의 사람들 대부분은 목표를 잃은 지 오래 됐기에, 원서 씨는 어떤가 묻고 싶습니다.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 제가 사는 이곳은 인공 하늘의 해가 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사는 그곳도 무사히 하루가 마무리되길 바라요.
이만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백해온
3.
-백해온 씨
다시 연락 주셔서 고마워요. 짧은 시간이지만 잘 지내셨나요?
운이 좋은 하루였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사실 전 운이 좋다는 게 어떤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행운이 따른다고 느낄 만큼, 그 하루가 해온 씨에게 행복의 연속이었다는 이야기겠죠. 다행인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 행운을 줄 수 있다는 것도요.
제가 본 달은… 크고 둥글어요. 그리고 그 모양을 본 뜬 건 해온 씨의 세상에도 있겠죠. 아, 이 곳엔 별도 많은데… 해온 씨의 세상에선 어떤가요? 미안해요. 저는 예술적인 표현에 약한 편이에요. 이 시대의 예술은 몰락했고 과거의 영광만이 작은 데이터로 남아있거든요.
그래도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달은 항상 노랗게 빛납니다. 사실, 태양이 뜨지 않는데 어떻게 태양의 빛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낮에 뜬 달은 하늘의 대기 때문에 희게 빛난다고 하는데… 글쎄요. 저는 밤의 시대를 살고 있기에 그런 달은 자료로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치만 달을 보신 적 없다니 아쉬워요. 이 세상에서 볼 것이라곤 달 뿐이니까요. 아, 저를 탄생시킨 부모가 그렇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네 눈은 달의 색이라고.
목표라. 사람들은 모두 목표를 가지고 사나요?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데에 목적이 있다면… 더 많은 것을 알아내는 일이겠죠. 이 세상을 알고, 이상현상을 알고, 모르는 것들을 배우고 습득하고. 제 생각엔 해온 씨가 제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해온 씨는 목표가 있나요?
저는 해온 씨와 편지를 하며 기대를 배운 것 같아요.
무언가를 기다리는 짓은 해 본 적 없거든요. 그렇지만 해온 씨의 편지를 기다리다 보면… 언제쯤 도착할까, 하는 추측을 하곤 해요.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기대라는 것 같아요. 해온 씨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저는 제 목소리를 깨달아요. 저는 목소리가 있지만 말하지 않고, 이지가 있지만 의사소통을 할 상대가 없죠. 이런 세상에 살면 자연스럽게 기대도 버리게 돼요. 내일이 오는 게 궁금하지 않으니까요. 제 미래는 제 과거의 연속이고, 또한 누군가의 산물입니다. 이런 제 말을 해온 씨가 이해하는 날이 올까요?
해온 씨 세계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이 곳은 춥고, 어둡고… 또 외로워요. 그래요. 외로운 것 같아요. 그 전까진 느끼지 못했는데 해온 씨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이후론 그렇게 느껴요. 여긴 그런 곳이니까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채원서
- 채원서 씨에게
저는 잘 지냈습니다. 원서 씨는 잘 지내셨나요?
이곳에도 별은 존재합니다. 비록 스크린 너머의 데이터일 뿐이지만요. 재미있는 게, 별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많이 갈리더군요. 자신이 사는 곳은 밤하늘에 별이 수놓은 것 같았다는 분도 계시고, 도시의 빛에 묻혀 지하에 내려오기 전까지 별은 보지 못하고 살았다는 분도 계십니다. 같은 하늘 아래 모두가 다른 풍경을 본다니, 참 신기하지 않나요?
원서 씨의 눈은 달의 색이군요. 문장으로 전해지는 것만 해도 이리 아름다운데, 실제 마주보면 어떤 느낌일지 더욱이 궁금해집니다. 제 눈은… 나무의 색이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참나무의 짙은 고동색 껍질과 닮았다고요. 당신은 달을, 저는 나무를 닮았으니 이마저도 하늘과 땅 같다고 느껴지네요.
목표마저 원서 씨 답다고 한다면, 기분이 나쁘실까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근원에 다다르다. 이름과 어울리는 목표라고 생각돼서요.
저는 원서 씨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제 세상이 넓어지는 것을 느껴요. 꼭 처음 마주하는 하늘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서 씨의 말을 모두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습니다. 모두가 목표와 희망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사는 건 외로운 일이니까요.
목표… 그러고 보니 제 목표를 물으셨죠.
이곳에는 정기적으로 지상에 나가 조사를 하는 단체가 존재합니다. 저는 그 단체에 들어가고 싶어요. 직전에 말했듯, 모두가 목표와 희망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사는 건 외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목표와 희망을 찾아주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면 조금 거창해 보일까요?
이곳에서 태어나 가장 처음 접하는 감정들은 절망입니다. 다시는 지상의 빛을 볼 수 없고, 맑은 공기를 맡을 수 없다는 절망 말이에요. 그 이후에는 포기를 배우죠. 저는 그 사람들에게 지상의 빛을, 공기를, 바다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해도 사실 제가 살아있을 동안 이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누군가에게는 제 의지와 희망이 빛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죠.
원서 씨와 대화를 나누면, 제가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제가 원서 씨에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만큼, 저도 원서 씨의 외로움을 덜어드릴 수 있기를 부디 바랄 뿐입니다.
오늘 편지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이 편지로 당신의 외로움이 덜어지길 바라요.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백해온
4.
- 백해온 씨에게
좋은 저녁입니다. 음, 그러니까… 이곳은 늘 저녁이지만.
오늘은 무엇을 했나요? 저는 식사라고 부를 만한 것을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식사. 식사라고 하니 생각 나네요. 해온 씨의 세상엔 음식이 많나요? 이 곳엔 ‘음식‘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걸 먹을 사람들이 이젠 없거든요. 그래도 한번 먹어보고 싶긴 해요. 소화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저는 그동안 유머를 배웠어요. 과거의 기록으로 배우는 게 전부지만요. 그래, 밤하늘에 별이 수놓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던 그 사람… 저랑 잘 맞을 것 같네요. 어떤가요, 이 유머. 유머 같긴 한가요?
고동색이라니 궁금해요. 전 다른 사람의 눈을 본 적 없거든요. 이럴 때엔 해온 씨와 제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무척 아쉽습니다. 우린 서로 다른 것도, 통하는 것도 많으니 분명 배울 점이 많을 텐데 말이에요. 해온 씨도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아 기쁩니다.
조사단에 들어간 해온 씨라니 뭔가 그럴 듯하네요. 해온 씨는 아주 진취적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인 것 같거든요. 그러고 보니, 해원 씨의 나이는 어떻게 되나요? 제 상상으론 열일곱 이상, 스물 아홉 이하… 쯤 될 것 같은데 어떨지 궁금합니다.
해온 씨는 참 밝은 사람 같아요. 그 밝다는 게 성격의 밝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어도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걸 어려워한다던데, 해온 씨는 그 어려운 일을 용케도 잘 해내는구나 싶습니다. 맞아요. 세상과 세계를 밝혀내면, 사람들의 얼굴도 밝아지겠죠. 좋네요. 저도 해온 씨 생각을 하며 한번… 이 탑 바깥으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거든요. 아마 이곳에 묻힐지도 모르죠. 누군가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해온 씨는 등불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나는 외로움이라는 걸 모르거든요. 그건 내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에요. 저는 혼자서 살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예요. 그러니 그런 생각은 마요.
우리는 살아있어요. 호흡은 다를지언정 같은 마음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잖아요. 저는 해온 씨가 궁금합니다. 조금 더 많은 걸 알려 주세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p.s. 정말로 사람들끼린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나요?
-채원서
- 채원서 씨에게
좋은 저녁 보내고 계신가요? 이곳은 이제 막 정오가 지난 시간입니다. 오늘 편지는 평소보다 이르게 도착했네요.
오늘 하루는 쉬어가려고 합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원서 씨는 어떤가요? 그곳은 늘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린다고 하셨는데, 감기에 자주 걸리지는 않나요?
이곳의 식사는… 대부분 감자로 이루러진 음식이 주메뉴입니다. 초기에 여러 시도를 했다고 들었는데, 결국 감자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넓은 밭과 양지가 필요한 것들은 결국 실패했다는 얘기도요. 과분한 바람이지만, 원서 씨와 편지 뿐만 아니라 물건도 주고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 그렇지만 역시 음식은 무리일까요.
먼저 말하자면, 제 유머 감각은 바닥을 칩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유머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요.
편지를 주고받으며 느낀 건데, 원서 씨는 감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이런 건 타고나는 것일까요? 저는 올해로 스물여섯이 됩니다. 덧붙이자면, 새해의 첫날 태어났다고 해요. 원서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제 추측으로는… 저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원서 씨를 탑 바깥으로 나갈 계기가 된 걸까요? 태어난 곳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둥지를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저로 인해 누군가 변화하고, 도전하는 건 기쁜 일인 것 같습니다. 나중에 탑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면 그 풍경을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원서 씨가 그렇다고 하시니, 외롭다고 표현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외롭다는 생각이 드시거늘… 제 편지를 생각해 주세요. 저희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지만, 이렇게 기연을 얻어 대화하게 되었으니까요.
제 무엇을 알려드려야 할까요? 누군가에게 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적은 처음이라, 어떤 말을 적어야 할지 망설여지네요. 얼마든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 주세요. 저도 원서 씨가 궁금합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사람들은 별 것 아닌 일에도 쉽게 사랑을 붙이고는 합니다. 감사를 전할 때나 미안함을 표현할 때, 친밀감을 표현할 때에도 말이에요. 누군가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흐려지는 게 아니냐며 싫어할 수도 있지만, 글쎄요. 저는 사랑이 그리 거창한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떠올릴 때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랑이라고 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오늘 편지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오늘도 이 데이터가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요.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p.s. 저도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니 이 편지도 사랑의 한 종류일지도 모르겠다고 하면, 너무 낯간지러운 소리일까요?
-백해온
5.
-백해온 씨에게
좋은 오후입니다. 몸은 좀 괜찮은가요? 편지를 받는 데에 꽤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대부분의 질병에 통하는 약물이나, 해결책을 알고 있는데 말이에요. 아, 물론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다르니 통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사람의 육체는 연약하고 한번 죽으면 끝이니까요.
감자라, 그 황색 색상의 둥글고 울퉁불퉁한 작물을 말하시는 거겠죠? 당연한 말이지만 한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질린다고들 하던데, 그 음식이 물리진 않나요?
괜찮아요. 저도 그리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걸요.
해온 씨는 올해로 스물여섯이 되었군요. 1월 1일이 생일이라니, 해온 씨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저는... 태어난 지 삼 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해온 씨와 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지 않았거든요. 외적으론 20대의 외형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젋고, 건강할 때의 외형으로 만들어졌어요.
예상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사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제가 부모라고 칭하는 기계공학자가 만들어낸 산물이죠. 제 세계에선 저 같은 존재를 안드로이드라고 합니다. 해온 씨의 세상에도 존재하나요? 이 세상엔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요. 의사소통이 가능한 생명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온 씨는 제게 많은 걸 가르쳤어요. 해온 씨가 의도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저는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오늘은, 해온 씨가 한 말을 생각하며 외부 탐사 준비를 했고요. 저는 튼튼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 조만간 나가 보려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이 세계의 바깥 풍경을 설명하는 글을 써 보낼게요. 그러니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외롭지 않아요.
해온 씨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뭘 배웠는지 알고 싶어요.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어제 침대에 누워 봤어요. 아직까진 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게 사람은 데이터의 영역으로만 남아있는 존재예요. 눈을 뜨고 가동을 시작했을 때엔 아무도 남지 않고 혹독한 겨울이 왔거든요. 그래서 해온 씨가 낯설고, 신기합니다. 별거 아닌 것에도 사랑을 붙인다니 인간은 낭만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 그렇게 만들지 않아도 사유하고, 기쁨을 나누고, 사소한 것에 사랑을 하니까요. 아마 해온 씨도 그렇게 살겠죠.
누군가를 생각하기만 해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사랑이라니... 오늘 또 하나를 배운 것 같아요.
이만 편지를 줄일게요. 혹여 제가 사람이 아니란 이유로 제게 마음이 떠났다면 잘 지내라는 말 한 마디만 보내주세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p.s. 그게 사랑의 정의라면, 저는 해온 씨를 사랑하는 걸까요?
-채원서
-채원서 씨에게
좋은 오후입니다. 컨디션은 많이 좋아졌어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겪는 일이니까요.
지하로 내려온 사람들은 모두 크고작은 기침을 달고 삽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공기를 정화시킨다한들, 이곳은 지하니까요. 제가 사는 곳의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천식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증상이 심한 사람은 이곳 공기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경우도 많죠. 조용한 골목에 울려퍼지는 기침 소리를 듣고 있으면, 새삼스럽게도 지하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사춘기 시절에는 어르신들이 말하는 지상은 그저 상상일 뿐이고, 인간은 본래 지하에 사는 생물이라고 믿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유치하지요?
원서 씨가 생각하는 그 작물이 맞는 것 같아요. 음… 질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늘 같은 방법으로 요리해 먹는 건 아니니 괜찮습니다. 굽거나 찌는 방법 외에도 으깨서 끓인다거나, 조리 방식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지거든요. 게다가 제가 아는 맛은 한정적이니까요. 모르는 건 그리워할 수 없는 법이거든요.
이곳에 원서 씨와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안드로이드라고 불리는 존재가 있긴 하지만, 그들은 사물의 모습일 뿐더러 그저 입력한 결과를 출력하는 존재일 뿐, 스스로 사고할 수 없죠. 원서 씨의 정체를 듣고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 그래요. 사람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몸을 이루는 구성이 다를 뿐, 원서 씨는 남들과 같이 사고하는 존재인 걸요. 원서 씨가 태어난 날… 그러니까, 만들어진 날은 언제인가요?
벌써 준비를 마치셨군요. 원서 씨,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기분을 떠올리기 어렵다면, 생각도 좋겠네요. 제게 바깥은 미지의 공간이기에, 첫 탐사를 나서기 전 당신의 심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울 때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육체적인 피로 외에도 하루를 마치고 보금자리에 누웠다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주거든요. 일종의 마무리 같은 느낌이려나요.
이럴 때면 서로가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사는 세계가 다르기에 서로를 통해 새로운 것을 알아갈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만, 이곳에서 원서 씨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20대의 외형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원서 씨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확실히 말해두는 거지만, 당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제가 실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짐승도 많은걸요. 제 말은, 원서 씨가 어떤 존재였든 저는 이 대화가 즐거울 거라는 겁니다.
오늘 편지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답장 기다릴게요.
p.s.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편지는 사랑을 싣고 나르는 셈이 되겠네요.
-백해온
6.
-백해온 씨에게
컨디션이 좋아졌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아픔에 익숙해진 건 슬픈 일 같고요. 해온 씨에게 아무리 익숙하다고 해도, 저는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하게 되네요.
환경과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만, 역시 속상한 일이긴 해요. 새로 태어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병을 가지고 태어난다니… 한 이십 년쯤 지나 세대가 바뀌면, 그땐 질병이 없는 아이들이 유별난 존재가 될까요?
전혀 유치하지 않아요. 다양한 수를 가정하고,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상상을 하는 건… 때로 도움이 되니까요. 그게 도피일지라도요. 해온 씨는 잘 버텼고, 잘 큰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나중에 특별한 레시피를 습득하거나 배우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해온 씨의 세계도 후일 시간이 지나면 저 같은 존재가 탄생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이 곳에서도 초기의 안드로이드와 기계는 그런 모습이었거든요. 인간으로 따지자면, 그들은 제 조상님쯤 됩니다. 사고하는 안드로이드가 뛰어난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제 스스로에게 감사를 느끼곤 해요. 그게 아니었으면 해온 씨와 만나지 못 했을 테니까요. 제가 해온 씨에게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기쁩니다. 저는 음력 1월 15일, 태어난 이래로 쭈욱 살아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마침, 오늘 준비를 마쳤어요. 아마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나가 보려고 합니다. 미지의 세계는 생각보다 기대가 앞서네요. 모르는 게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에요. 새로운 앞날을 기대하게 되니까요. 이게 미래를 꿈꾼다는 거겠죠. 저는 이제 조사단에 들어가겠다던 해온 씨처럼, 미래를 꿈꿀 줄 아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좋아요. 오늘은 편안함을 느끼며 침대에 눕도록 하겠습니다.
제 외형이요? 글쎄요. 아, 절 만든 이의 데이터가 남아있습니다. 절 완성하고 나서 보기 좋단 말을 했었습니다. 쉽게 호감을 살 수 있는, 선한 인상이라고 하더군요. 생김새는 다른 사람들과 같아요. 조금은, 그를 닮은 것도 같고요. 전 까만 머리카락과 노란색 눈동자의 외형을 하고 있습니다. 키는… 큰 편입다. 이렇게 저를 구성한 데엔 이유가 있겠죠. 해온 씨는 어떻게 생겼나요? 왠지 부드러운 인상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고마워요. 저도 해온 씨가 어떤 모습이든, 설령 인간이 아닌 존재일지라도 좋습니다. 당신이 어떤 존재이든간에 이 대화는 유익하고 즐거워요. 나를 웃게 만들죠.
저도 이만 끊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밖에선 폭설이 내립니다. 이 순간에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소리가 들려요. 편지를 지금 보내면 한밤 중에 도착할까요? 그럼, 굿나잇 인사를 드릴게요. 잘 자요, 해온 씨.
p.s. 그건 정말 낭만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감정을 배우는 게 가장 즐겁거든요.
-채원서
-채원서 씨에게
좋은 저녁입니다, 원서 씨.
제가 이곳의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천식이라 말씀드렸지요? 이 말이 원서 씨의 걱정을 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열에 아홉이 아닌 하나를 맡고 있습니다. 컨디션이 저조하거나, 공기가 안 좋은 날에는 잔기침을 동반하지만, 이곳에서는 아주 양호한 상태라고 할 수 있죠.
세대가 바뀌고 질병 없이 지하에 적응한 아이들이 태어난다면, 사람들은 기뻐할까요? 어쩌면 기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가 되면 더이상 지상을 경험한 사람은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요. 인류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지하에서 살아가겠죠.
이곳에서도 당신의 존재와 비슷한 것들을 연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글쎄요. 몇 년 전부터는 많은 사람이 포기하고 손을 놓았다는 소리도 같이 들려와서요. 하지만 중단되었다는 말은 없으니, 여전히 누군가는 진행하고 있다는 소리겠죠?
음력 1월 15일. 좋은 날이네요. 저는 본 적 없지만, 그날은 한 해의 첫 보름이 뜨는 날이라고 들었습니다. 원서 씨는 태어나는 순간, 그 해의 처음 뜨는 보름을 마주한 셈이겠네요. 이렇게 보면 원서 씨는 달과 연이 참 깊은 것 같아요.
원서 씨도 저처럼 미래를 꿈꾸게 되셨다니 기쁩니다. 저도 언젠간 조사단에 들어가 첫 탐사를 하게 되면, 원서 씨에게 편지를 보낼게요. 어떤 기분이었고, 그곳은 어떤 곳이었는지 말이죠. 이번 탐사가 당신에게 좋은 감상을 안겨주면 좋겠습니다.
원서 씨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군요. 까만 머리카락과 노란 눈동자라…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못났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저를 본 사람들이 종종 사기 잘 당하게 생겼다는 말을 합니다. 칭찬일까요? 저는 연한 베이지색의 머리카락과 고동색의 눈을 가졌어요. 아, 어느 노인분께서 제 머리카락을 보고 크림 같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는데… 원서 씨는 아시나요? 커스터드가 살짝 섞인 생크림 같다고 하셨지만, 저는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체구는… 이곳 사람들의 평균보다 큰 편이에요. 조사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해요. 그래서, 저는 조사단이 되기로 마음 먹은 그날부터 운동을 시작했답니다.
이번 탐사에 행운이 따르기를 바라겠습니다. 원서 씨가 다른 사람보다 튼튼하다는 건 알지만, 부디 몸조심 하세요. 오늘 편지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원서 씨.
p.s. 당신에게 더 많은 감정들을 알려주고 싶어요. 또 궁금한 감정이 있나요?
-백해온
7. 마지막
-백해온 씨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드리는 기분입니다. 마지막 편지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오랜만인 기분이 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새 익숙해진 걸까요? 삼 일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벌써 허전한 느낌이 들어요.
해온 씨가 건강하다니 다행이네요.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날이 좋지 않은 날이면 혹시나 하는 생각과 함께 해온 씨가 떠오를 것 같아요. 옅은 잔기침을 달고 산다니 말이에요.
갖고 있던 것을 빼앗기는 것만큼 속상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게 아니게 되는 순간,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기도 합니다. 해온 씨의 말대로,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 윗세대가 된다면… 더 이상 해온 씨와 같은 사춘기를 보내는 어린 아이들이 나타나지 않겠군요. 사람들은 대단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끈기 같은 것들이요. 저는 연료가 부족하거나, 큰 상해를 입었을 때엔 하던 일을 중단하고 돌아가게끔 설계 되어 있는데… 언젠간 저도 끈기 있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글쎄요. 칭찬일까요? 무엇이 되었든 해온 씨가 부드러운 인상인 건 확실하군요. 제 추리와 비슷한 것 같아 기뻐요. 이게 정답을 맞힌 기분이겠죠.
저는 오늘 이 탑 밖으로 나가게 되었어요. 제겐 편지를 보낼 프로그램이나 그만큼의 송신 기술이 탑재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마 이번 편지가 마지막일 것 같아요. 다시 제가 이 첨탑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땐 다시 인사를 드릴 수 있겠죠. 그러나 얼마나 걸릴진 장담하지 못 하겠습니다. 제가 무사히 이 곳에 돌아올 수 있을지도요. 밖은 위험한 곳이니까요.
생각보다 챙길 짐은 초라했습니다. 아예 없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몰라요. 실제로도 제가 챙긴 건 작은 메모 하나니까요. 해온 씨의 이름이 적힌 작은 쪽지예요. 초상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그건, 그래요. 너무 낯간지러울 것 같았어요. 이거라면 혼자 있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적었는데 혹시… 불쾌하신가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종종 봤어요. 음… 안드로이드는, 그리고 저는 학습이 빠르니까요.
저는 이처럼 해온 씨 덕분에 목표를 실행으로 옮기게 되었어요. 많은 영향을 받았죠. 아마 해온 씨의 편지를 못 받고 떠날 것 같기도 해요. 제가 도출한 가장 최적의 시기가 바로 오늘 저녁이거든요. 그렇지만 꼭 돌아올 거예요. 다시 돌아와야만 해온 씨가 보낸 편지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시간을 신경 쓰고 지내지 않던 제가 해온 씨와 편지를 나누며 시간을 의식하게 되었어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여러모로요. 나는 운이 좋았어요. 이곳에 이렇게 탄생했고 정말로 살아있으니까요.
다시 돌아온다면 해온 씨가 목표를 이뤘는지 듣고 싶어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워요. 지난 시간은 제 탄생 이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죠? 이만 줄이겠습니다. 몸관리도 잘 하고, 즐겁게 지냈으면 해요. 불가능하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마지막 인사를 보냅니다. 백해온 씨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저는 이 세계의 끝을 보러 가요. 낙원이 있으리란 믿음으로요.
p.s. 제가 이 곳에 다시 도착하게 된다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행운이 따르길 기원하며, 채원서
- 채원서 씨에게
이곳의 시간으로는 하루 하고 반이 지났습니다. 혹여나 제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나, 하고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에요. 새삼 제가 원서 씨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전부 사라진다면… 저는 어쩌면, 조금 씁쓸할 것 같기도 합니다. 더이상 이곳의 사람들은 지상을 추억할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으니까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제 눈에는 원서 씨도 대단해 보입니다.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포기하고 나태해지고는 합니다. 제가 전에 말한 적 있었죠. 원서 씨는 감이 좋은 것 같다고 말이에요. 원서 씨가 제 나이를 추리하셨을 때, 인상을 추리하셨을 때. 모두 맞히셨으니까요. 무언가를 맞혔을 때는 뿌듯함이 동반되는데, 원서 씨가 느낀 감정 중에는 뿌듯함도 있을 수 있겠어요.
드디어 탑을 나서는 날이 왔군요. 제가 나서는 것도 아닌데 긴장감과 설렘, 그리고 기대가 느껴집니다.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을 수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다시 편지를 주고받게 될 날, 원서 씨가 무슨 얘기를 들려줄 지 기대가 돼요.
제 이름을 적은 쪽지라니, 저도 함께 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편지가 도착했을 쯤에 원서 씨는 탑 바깥에 있겠죠? 다음에는 제 초상화도 함께해 주세요. 원서 씨가 그 초상화를 바라보며 저를 떠올린다면, 저도 기쁠 것 같거든요.
원서 씨와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정말 즐거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 원서 씨의 편지를 받게 된 게 저라서 참 다행이에요. 원서 씨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저를 기다려 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저는 앞으로도 원서 씨를 기다릴 것 같습니다. 다음에 편지할 때는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세요.
다음 편지가 도착할 때는 아마 꽤 시간이 흐른 뒤겠죠? 저도 그때는 목표를 이뤄보겠습니다. 바깥으로 나가 더 넓은 세상을 겪고, 많은 걸 본 뒤, 원서 씨에게 들려드릴게요.
편지를 마무리해야 된다는 게 아쉽게 느껴지지만,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 아니니까요.
당신이 돌아오는 그날, 다시 편지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p.s. 저도 그때까지 더 다양한 감정을 배워오겠습니다. 부디 몸조심 하세요.
- 당신의 앞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백해온
+)
- 백해온 씨에게
잘 지냈습니까?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네요. 저는 한 달간의 탐사를 끝내고 다시 탑으로 돌아왔습니다. 생각보다 이곳엔 볼 게 많고 저는 그리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어요. 추위에 얼어가는 손가락을 볼 때면 보수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죠. 적당한 구조물에 몸을 숨기고 종종 그렇게 몸을 수리할 때면… 언제나 해온 씨 생각이 났어요.
그렇지만, 초상화를 그려도… 그게 해온 씨의 얼굴은 아닐 테니 말이에요. 그저 제 안의 상상도겠죠.
이젠 보고 싶다는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습니다. 해온 씨가 보고 싶어요. 무언갈 배우는 건 딱히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아요. 타인의 존재를 알지 못 했으니 자연스레 외로움도 몰랐는데, 해온 씨가 없으니… 조금 그립고 외로운 것도 같아요.
해온 씨는 목표를 이뤘습니까?
저는 한 달 간의 탐사 끝에 많은 걸 알아냈습니다.
제가 머무는 이 행성… 정말 살아있는 생명체가 없어요. 제가 가본 곳이라면요.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어요. 아주 먼 곳에서 미약한 신호가 느껴져요. 조금 더 준비를 하고 최적의 루트와 최선의 방법을 찾아 가보려고 합니다. 희망을 배운 것 같아요.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이 말이 망설여지지만… 보고 싶어요. 해온 씨는 제게 있어 또 하나의 희망인 것 같아요.
- 떨리는 손으로, 채원서.
After
프로젝트를 끝내고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해온과 원서는 같은 행성 정반대편에 살고 있다는 설정이 생겼습니다. 세 살 먹은 안드로이드는 이제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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